한국의 유네스코지정 문화유산 2 『잡학』

● 세계기록유산
기록유산은 인류의 문화를 계승하는 중요한 유산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훼손되거나 영원히 사라질 위험에 처한 경우가 많다.
이에 유네스코는 1995년 기록유산의 보존과 이용을 위해 기록유산의 목록을 작성하고 효과적인 보존수단을 마련하기 위하여 사업을 시작하여 기록유산의 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90점(2004, 3월 현재)의 기록유산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 기록유산이란?

기록유산은 단독 기록일 수 있으며 기록의 모음(archival fonds)일수도 있다. 주로 두 가지 경우로 나뉘는데 기록을 담고 있는 정보와 그 기록을 전하는 매개물이다.
예)
- 필사본, 도서, 신문, 포스터 등 기록이 담긴 자료와 플라스틱, 파피루스,
양피지, 야자 잎, 나무껍질, 섬유, 돌 또는 기타자료로 기록이 남아있는 자료
- 그림, 프린트, 지도, 음악 등 비기록 자료(non-textual materials)
- 전통적인 움직임과 현재의 영상 이미지
- 오디오, 비디오, 원문과 아날로그 또는 디지털 형태의 정지된 이미지 등 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전자 데이터

☆ 목적

■세계적인 중요성을 갖는 기록유산의 가장 적절한 수단을 통한 보존을 보장하고 국가 및 지역 수준의 중요성을 지닌 기록유산의 보존을 장려
■전세계 다양한 사람들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고 평등한 이용을 장려
■기록유산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기타 자료들을 발전시키고 그것들을 전세계에 널리 보급
■세계적 관점에서 중요한 기록유산을 갖고 있는 모든 국가들의 인식을 높임

☆ 주요활동

■세계의 기록 목록: 세계적인 가치가 있는 기록물들의 목록을 만들고 그러한 기록유산에 세계기억이라는 라벨을 붙이는 작업을 수행
■프로젝트: 첨단 정보기록방식인 디지털화를 통한 보존수단을 마련하는 한편 필요한 자금을 조달, 지원하는 작업을 수행

■시범사업:

- 프라하 原稿本(Manuscripts of Prague) 사업
- 라지빌 연대기(Radzivil Chronicle) 사업
- 성 소피아(Saint Sophia) 사업, 사나 原稿本(The Sana's manuscripts)사업
- 이베로 아메리카의 기억 (Memoria de Iberoamerica) 사업
- 칸딜리 천문대의 原稿本(Manuscripts of Kandilli Observatory) 사업
- 러시아의 기억(Memory of Russia) 사업
- 아프리카 엽서(African Postcards) 사업
- 다르 알 쿠툽의 보물 (Treasures of Dar Al Kutub) 사업
- 빌니우스 대학 原稿本 (Manuscripts of Vilnius University) 사업
- 라틴 아메리카 및 카리브 지역의 사진 콜렉션 사업

☆ 선정기준

▷ 주요기준

■영향력(Influence): 기록유산이 일국 문화의 경계를 넘어 세계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력을 끼쳐 세계적인 중요성을 갖는 경우
ex) 세계 역사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 정치, 종교 서적 등

■시간(Time): 국제적인 일의 중요한 변화의 시기를 현저하게 반영하거나 인류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두드러지게 이바지한 경우
ex) 초기 영화산업의 자료 유산, 독립운동 또는 특정한 시점과 장소의 관습 등과 관련된 내용

■장소(Place): 기록유산이 세계 역사와 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던 특정 장소(locality)와 지역(region)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경우
ex)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기간 동안에 전세계 여러 지역의 특별히 중요한 장소와 관련되거나, 전세계 역사에 큰 반향을 일으킨 정치, 사회 종교 운동의 태동을 목격하고 있는 기록유산

■사람(People): 전세계 역사와 문화에 현저한 기여를 했던 개인 및 사람들의 삶과 업적과 특별한 관련을 갖는 경우

■대상/주제(Subject/Theme): 세계 역사와 문화의 중요한 주제를 현저하게 다룬 경우
ex)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도서관에 있는 Radziwill Chronicle (편년사)사업

■형태 및 스타일(Form and Style): 형태와 스타일에서 중요한 표본이 된 경우
ex) 야자수 나뭇잎 원고와 금박으로 써진 원고, 근대 미디어 등

■사회적 가치(Social Value): 하나의 민족 문화를 초월하는 사회적, 문화적 또는 정신적으로 두드러진 가치가 있는 경우

▷ 이차적인 기준

■원상태로의 보존(Integrity): 특별히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경우
■희귀성(Rarity): 독특하고 특별히 진귀한 경우

☆ 선정절차

■기록유산의 신청은 원칙적으로 정부 및 비정부 기구를 포함한 모든 개인 또는 기관이 할 수 있으나 관련 지역 또는 국가 위원회가 존재한다면, 그곳을 통해서 도움을 받음.
■유네스코본부내 PGI(일반정보사업국)에서 신청을 받아 검토
■2년마다 열리는 국제자문위원회 정기총회에서 최종 결정

☆ 조직

■국제자문위원회:
정기회의는 2년마다 개최하는데 4차 회의는 99년 비엔나에서 개최되었으며 2001년 6월 청주에서 제5차 국제자문위원회 회의가 개최되었음.
■지역위원회와 국가위원회:
국가위원회는 세계적으로 45개국에 설립되었으며 아태지역에는 호주, 중국, 인도, 말레이지아, 네팔, 파키스탄, 태국에 설립되어 있음.
■사무국:
유네스코본부 PGI(일반정보사업국)에서 담당.
■홈페이지 주소:
http://www.unesco.org/webworld/mdm/
세계기록유산은 도서관 및 고문서 보관서 등에 보관된 위험에 처한 인류의 기록물을 보존하고 신기술 응용을 통하여 값진 소장문서를 보존·공유하기 위하여 유네스코에서 1992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국제목록작성사업이다.

이러한 세계기록유산 등록을 통해 우리 인쇄문화의 우수성에 대한 국제적 공인받는 계기를 마련함과 동시에 기록유산의 보존관리에 대한 유네스코의 기술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또한 1995년부터 세계문화유산 지정은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서 집행하는 사업으로 세계의 주요문화재를 보호하고, 알리고 있다. 불국사 및 팔만대장경, 종묘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http://www.unesco.or.kr/mow/menu1.html
1. 직지심체요절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이번 회의에서는 지금까지 신청된 모든 기록유산을 심의한다는 유네스코 사무국의 방침에 따라 지난 '98년 신청한 「직지심체요절」도 심의되었으며, 소장국이 프랑스라는 점에서 그 등록 전망이 불투명하였으나 세계기록유산등록은 소장국의 문제가 아니라 기록유산 자체의 가치에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서양에서의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인 「구텐베르그의 성경」(1455년경)과 함께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도 등록하게 되었다.


□ 개 요

ㅇ 직지심체요절의 원제목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고려 공민왕 21년(1372) 백운화상이 저술하였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3년만에 제자들에 의해 금속활자로 간행됨.

ㅇ 직지심체요절은 중국 송(宋)나라때 나온 전등록(全燈錄)에서 역대 불조(佛祖)들의 법화(法話)를 요약한 것으로 1377년(고려 우왕3년) 청주교외에 있던 흥덕사(興德寺) 주자시(鑄字施)에서 인쇄한 하(下)권(상권은 아직도 발간되지 않고 있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음.

ㅇ 이 책은 1972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도서의 해"에 출품되어 독일의 구텐베르그 보다 78년이나 앞선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

□ 프랑스 유출경위

ㅇ 직지심체요절이 해외로 유출된 경위는 조선시대 고종때 주한 불란서대리공사로 서울에서 근무한 바 있는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가 수집해 간 장서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 그후 골동품수집가였던 앙리베베르(Henry Vever)에게 넘어갔으며 그가 1950년에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


직지심체요절은 고려시대의 승려인 백운화상이 역대 불조(佛祖)들의 법화(法話)를 요약·편찬한 고서적으로서 1377년 청주 교외에 있던 흥덕사에서 인쇄되어 현재는 그 하권(下卷)이 유일하게 남아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다.
2. 해인사 장경판전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http://home.cein.or.kr/~sunje98/mun-write_jikji.htm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며, 8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도 부른다.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과 인조 2년(1624)에 수리가 있었다.

앞면 15칸·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점 등으로 인해 대장경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3. 팔만대장경판
1995년 12월 석굴암·종묘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팔만대장경판의 보존상태현재 남아 있는 경판은 8만 1258판이다. 8만여 판에 8만 4000번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실려 있으므로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함.팔만대장경판의 가치와 의의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음
.
팔만대장경판이 있는곳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伽倻面) 치인리(緇仁里) 해인사 경내의 2동(棟)의 장경판고(藏經板庫)에 보관.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은 지금부터 750여년전인 고려 고종23년[1236년] 부터 고종38년인 1251년까지 16년에 걸쳐 제작되었다.
몽골의 병란을 맞아 국가가 위기에 처하였을때..
전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겠다는 일념으로 만든 우리민족의 위대한 유산이다.
경판의 재직을 지금까진 대개가 자작나무라 하였지만..
전자현미경으로 조사해 본 결과,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 었다.
경판은 총 길이는 68혹은 78cm이며 , 폭은 약 24cm ,
두께는 2.7~3.3cm의 범위이다.
경판은 한면에 23행, 한행에 14자, 전후 양면에 644자를 새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경판은 81.258판 .. 1511부 6802권의 엄청난 수를 자랑하고 있다.
보존상태 : 습기 , 통풍을 조절하는 해인사에 있다.
해인사 땅에는 숯 . 횟가루 , 찰흙 등을 넣어 다져 과학적이고
현대적인 건물로 훼손이 적은 편이다
국보 제 32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의해 보호받는 문화재이다.
만든시대 : 고려시대 고종24년에서 1253년간 제작
경판은 총 길이는 68혹은 78cm이며 , 폭은 약 24cm ,
두께는 2.7~3.3cm의 범위이다.
경판은 한면에 23행, 한행에 14자, 전후 양면에 644자를 새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경판은 81.258판 .. 1511부 6802권으로 현재
경판의 재직을 지금까진 대개가 자작나무라 하였지만.. 전자현미경으로 조사해 본 결과//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 었다.
팔만대장경판의 역사적 사실처음에 강화 서문(江華西門) 밖 대장경판고에 두었고, 그 후 강화의 선원사(禪源寺)로 옮겼다가, 1398년(태조 7)에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4. 창덕궁(昌德宮-秘苑包含)
창덕궁( 昌德宮 )은 조선( 朝鮮 ) 태종( 太宗 ) 5년(1405) 이궁( 離宮 )으로 지어진 궁궐로서, 그 뒤 여러 차례 보완( 補完 ) 공사( 工事 )가 계속되어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 ( 敦化門 )이 건립되었고 세조( 世祖 ) 9년(1463)에는 약 62,000평이던 후원( 後園 )을 넓혀 총 150,000여 평에 달하는 규모가 되었다.

임진왜란( 壬辰倭亂 ) 때 소실( 燒失 )된 것을 선조( 宣祖 ) 40년(1607)에 중건( 重建 )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光海君 )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 仁祖反正 ) 때 인정전 ( 仁政殿 )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 殿閣 )이 소실되어 인조 25년(1647)에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후에도 여러 번 화재( 火災 )가 있었으며, 1917년에는 내전( 內殿 )이 소실되어 경복궁 ( 景福宮 )의 교태전( 交泰殿 ) ·강녕전( 康寧殿 )·동서행각( 東西行閣 ) 등 많은 건물을 이건하였다.

창덕궁( 昌德宮 )은 광해군 때 정궁( 正宮 )으로 쓰게 된 뒤 약 300년 동안 역대( 歷代 ) 제왕( 帝王 )이 정사( 政事 )를 보살펴 온 곳이다.

현재 인정전 ( 仁政殿 )과 그 주위의 회랑( 回廊 )을 비롯하여 대조전 ( 大造殿 )과 낙선재( 樂善齋 ) 등 궁내( 宮內 )의 주요 전각( 殿閣 )은 창덕궁( 昌德宮 ) 내에 13동, 비원( 秘苑 ) 내에 28동이 있다.

없어진 건물은 인정문 ( 仁政門 ) 앞의 회랑( 回廊 ), 인정전과 대조전의 부속 건물, 낙선재 앞 건물 등 극히 작은 부분으로 장중( 莊重 )한 왕궁( 王宮 )의 규모( 規模 )가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의 규모는 131,781평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궁궐( 宮闕 ) 후원인 비원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고궁 중 하나이다.

비원( 秘苑 )은 태종( 太宗 ) 5년(1405) 창덕궁( 昌德宮 )을 창건( 創建 )할 때 후원( 後園 )으로 조성( 造成 )되었으며 창경궁 ( 昌慶宮 )과도 통하도록 되어 있다.

임진왜란( 壬辰倭亂 ) 때 대부분의 정자가 소실되고 지금 남아 있는 정자와 전각( 殿閣 )들은 인조 원년(1623) 이후 역대( 歷代 ) 제왕( 帝王 )들에 의해 개수( 改修 )·증축( 增築 )된 것이다.

이곳에는 각종( 各種 ) 희귀( 稀貴 )한 수목( 樹木 )이 우거져 있으며 많은 건물과 어정( 御井 ) ·연못 등이 있다.

역대( 歷代 ) 제왕( 帝王 )과 왕비( 王妃 )들은 이곳에서 여가( 餘暇 )를 즐기고 심신( 心身 )을 수양( 修養 )하거나 학문( 學文 )도 닦았으며 연회( 宴會 )를 베풀기도 하였다.

비원( 秘苑 )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傳統 ) 조원시설( 造苑施設 )으로 자연적( 自然的 )인 지형( 地形 )에다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아름답고 조화( 造化 )있게 건물( 建物 )을 배치한 왕궁( 王宮 )의 후원( 後園 )이다.자연적( 自然的 )인 지형( 地形 )에다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아름답고 조화( 造化 )있게 건물( 建物 )을 배치한 왕궁( 王宮 )의 후원( 後園 )이다.
내용출처 : [기타] 문화재청
합쳐서 부르는 책 이름이다. 즉 《태조강헌대왕실록(太祖康獻大王實錄)》
으로부터 《철종대왕실록(哲宗大王實錄)》에 이르기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통틀어 지칭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기획하여 편찬한 역사서가
아니라, 역대 조정에서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편찬한 것이 축적되어 이루
어진 것이다.
실록에는 일제침략기에 일본인들의 주도로 편찬된 《고종태황제실록(高宗太皇帝實錄)》과 《순종황제실록(純宗皇帝實錄)》은 포함시키지 않는다.
이들은 조선시대의 엄격한 실록 편찬 규례에 맞게 편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의 왜곡이 심하여 실록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고
그 성격도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이조실록(李朝實錄)》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실
록》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이들 중에는 《연산군
일기(燕山君日記)》나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와 같이 ‘일기’라고 한
것도 있지만, 그 체제나 성격은 다른 실록들과
똑같다. 대부분 왕대마다 1종의 실록을 편찬하였지만, 《선조실록》《현종
실록》《경종실록》은 만족스럽지 않은 면이
있다고 하여 후에 수정(修正) 혹은 개수(改修) 실록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또 《광해군일기》는 인쇄되지 못한 정초본
(正草本: 鼎足山本)과 중초본(中草本: 太白山本)이 함께 전하는데, 중초본
에는 최종적으로 산삭한 내용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많은 정보를 간직하고 있다.
정족산본(鼎足山本)의 초기 실록 및 두 본의
《광해군일기》는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현재 남한에는 정족산본 조선왕
조실록 1,707권, 1,187책과 오대산본 73책,
산엽본 등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가기록원 부산기록정
보센터에 태백산본 실록 1,707권, 848책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국보 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에는 《훈민정음
》 2본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조선왕조실록》은 한문으로 기록된 책이므로 일반인들이
읽기 어려웠으나,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가, 1972년부터는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역사업을 시작하여 1993년에 완성
하였다. 이 국역본은 신국판(新菊版) 413책으로
간행되었으므로 이제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를 보다 편리
하게 이용하기 위하여 1995년에 서울시스템(2003년에
솔트웍스로 개칭) 한국학데이터베이스연구소가 전질을 전산화하여 CD-R
OM으로 제작 보급하였다. 한편, 북한의
사회과학원에서도 적상산본 실록을 이용하여 1975년부터 1991년까지 국역
사업을 추진하여 총 400책의 국역실록을
간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일본으로 가져간 오대산본 실록은 관
동대지진 때 거의 소실되었으나 잔존본 46책
(성종실록 9책, 중종실록 29책, 선조실록 8책)이 현재 동경대 총합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반환되었다..
일들을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역사서로서, 일종의 연대기(年代記)에 해당한다. 그 기원은 황제
의 측근에서 매사를 기록하던 한대(漢代)의 기거주(起居注)에서 시작되지
만, ‘실록’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은 6세기 중엽 양(梁) 무제(武帝) 때 주흥사
(周興嗣)가 편찬한
《황제실록(皇帝實錄)》이 처음이다. 이후 당(唐)·송(宋) 시대를 지나면
서 그 체제가 정비되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는
지속적으로 실록을 편찬하였으나, 중세 이전의 것으로는 당대에 한유(
韓愈)가 편찬한 《순종실록(順宗實錄)》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근세의 실록인 《명실
록(明實錄: 大明實錄 혹은 皇明實錄)》 2,909권과
《청실록(淸實錄: 大淸歷代實錄)》3,000여권이 전하고 있으나, 《조선왕조
실록》처럼 내용이 풍부하지 않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초기(연대 미상)부터 사관(史館: 후에 예문춘추
관으로 개칭)을 설치하고 실록을 편찬하였다.
태조∼목종의 7대에 걸친 실록이 차례로 편찬되었으나, 1011년 거란족의
침략으로 궁궐·사관과 함께 소실되었다.
1022년에 황주량(黃周亮)·최충(崔沖)·윤징고(尹徵古) 등에게 《칠대실록
(七代實錄)》을 복원하도록 명하여
1034년에 완성되었다. 이를 이어 후대의 왕들도 실록을 편찬하였고,
조선 왕조도 고려의 전통을 계승하여, 태조
1398년에 공민왕 이후 고려말기 왕들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
들은 모두 여러 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모두
소실되고 전하지 않는다.
1431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여기에는 王子의 亂과 박포(朴苞)의 난과 관
련된 기사에 착오가 있어 1442년(세종 24)에 《태조실록》
과 함께 부분적으로 수정되었다.
이들 실록은 처음에는 2벌씩 작성되어 서울의 춘추관과 충주사고(忠州史
庫)에 소장하였다. 그러나 멸실의 염려 때문에
1439년에 사헌부의 건의로 2벌씩을 더 등사하고 전주와 성주에 사고
(史庫)를 신설하여 봉안하게 하였다. 이것이
조선초기의 사대사고(四代史庫)이다.
이후 조선의 왕들은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대대로 실록을 편
찬하였고, 편찬이나 관리에 엄격한 규례를 적용하였다.
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 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
현효대왕실록(英宗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
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 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實錄》이다.
의 체제와 격식이 있다. 이들을 정리해보면 대체로
아래와 같다.
5.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조선왕조실록》은 대부분 목활자로 인쇄한 간본(刊本)으로 되어 있지만,
실록(實錄)은 황제나 국왕과 같은 제왕의 조정에서 일어나거나 보고되는
《정종실록》은 1426년에 변계량 등에 의해 완성되었고, 《태종실록》은
志 36책 포함
있음
志(樂譜) 2책 포함
實錄
實錄
순서(왕대) 표제 권수 책수 편찬연도 원제/비
1 태조실록 15 3 1413 太祖康獻大王實錄
2 공정왕실록 6 1 1426 恭靖王實錄
3 태종실록 36 16 1431 太宗恭定大王實錄
4 세종장헌대왕실록 163 67 1454 世宗莊憲大王實錄 *
5 문종대왕실록 13 6 1455 文宗恭順大王實錄
(단, 제11권은 소실)
6 단종대왕실록 14 6 1469 魯山君日記 * 附錄
7 세조혜장대왕실록 49 18 1471 世祖惠莊大王實錄 *
8 예종양도대왕실록 8 3 1472 睿宗襄悼大王實錄
9 성종대왕실록 297 47 1499 成宗康靖大王實錄
10 연산군일기 63 17 1509 연산군일기
11 중종대왕실록 105 53 1550 中宗恭僖誠孝大王
12 인종대왕실록 2 2 1550 仁宗榮靖…欽孝大王
13 명종대왕실록 34 21 1571 明宗大王實錄
14 선조소경대왕실록 221 116 1616 宣宗昭敬大王實錄
14-2 선조소경대왕수정실록 42 8 1657 宣祖昭敬大王修正實錄
15 광해군일기(중초본) 187 64 1633 光海君日記(태백산본)
15-2 광해군일기(정초본) 187 40 1653 光海君日記(정족산본)
16 인조대왕실록 50 50 1653 仁祖大王實錄
17 효종대왕실록 21 22 1661 孝宗大王實錄
18 현종대왕실록 22 23 1677 顯宗彰孝大王實錄
18-2 현종대왕개수실록 28 29 1683 顯宗彰孝大王改修實錄
19 숙종대왕실록 65 73 1728 肅宗顯義元孝大王實錄
20 경종대왕실록 15 7 1732 景宗宣孝大王實錄
20-2 경종대왕개수실록 5 3 1781 景宗宣孝大王改修實錄
21 영종대왕실록 127 83 1781 英宗大王實錄
22 정종대왕실록 54 56 1805 正宗莊孝大王實錄
23 순조대왕실록 34 36 1838 純宗成孝大王實錄
24 헌종대왕실록 16 9 1851 憲宗哲孝大王實錄
25 철종대왕실록 15 9 1865 哲宗英孝大王實錄
합계 1894 888 태백산본 실록 전체는 총 1,707권, 848책
* 《영종대왕실록》의 정식 명칭은 《영종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실록》이래 대체로 준행되어 온 일정한 편찬
편성하였기 때문에 그 권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다.

육 과정, 세자로의 책봉, (입후된 왕의
경우)친생부모와 입후의 과정 등 인물 정보를 비교적 간략히 기
록하였다.

지만, 단순한 일기나 일지 류의 사실
기록이 아니라 기록자 혹자 편찬자들의 비판적 안목과 사관이 많
이 가미된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편년체 기사와 별도로 지(志)를 붙인 것은 《세종실록》과 《세조
실록》에만 있고, 《단종실록》에는
위호(位號) 복위의 과정과 관련된 문헌을 부록으로 붙이기도 하였다.

다. 왕의 연도는 대체로 유년칭원법
(踰年稱元法)에 따라 당해 왕의 즉위한 다음 해를 원년으로 쓰지만,
세조(世祖)나 중종(中宗) 인조(仁祖)와
같이 전왕의 정통성을 부인할 경우에는 즉위년부터 바로 원년으로
쓴다. 왕의 연도 표기 아래에는 중국
황제의 연호를 세주로 표시하였다. 초기의 실록에는 “春正月”
“夏四月”과 같이 계절을 기록하였지만,
후기에는 대체로 생략하였다. 날짜가 바뀌거나 기사의 내용이 다른
경우에는 ○표를 넣어 문단을
분리하였다.

붙였다. 대체로 史臣曰로 시작되는 사관들의
논평 즉 사론(史論)은 문단 전체를 상단으로부터 한 자씩 내려서 썼다.
논평을 세주에 기록한 경우도 많다.

冊文)·능지문(陵誌文) 등의 전기류 자료
들을 수록하였다.

실록에 수록되는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국왕과 신하들의 인물 정
보, 외교·군사 관계, 국정의 논의 과정,
의례(儀禮)의 진행, 천문 관측 자료, 천재지변 기록, 법령과 전례
자료, 호구와 부세(賦稅)·요역(役)의
통계자료, 지방정보와 민간 동향, 계문(啓聞)·차자(箚子)·상소(上疏
)와 비답(批答)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실록의 찬수 때마다 일정한 범례
를 만들어 기사의 취사선택에 관한 기준을
정하기는 하지만, 국정의 운영이나 사회의 동향에 관한 거의
모든 정보들이 실록에 수록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초기의 실록에는 유교적 규범의 관점에서 수록하기 곤란
한 내용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갈수록 실록의 기사가 정치적 내용에 치우쳐 다양성을
잃게 되고 기록이 빈약하게 되었다.

《성종실록》은 기사의 다과를 불문하고 1개월 치를 1권으로

당해 국왕의 성명, 자호(字號), 부모와 출생 연월일 및 성장과 교

실록의 이러한 형태는 전형적인 연대기(年代記) 자료와 같이 보이

연월일의 표기는 왕의 연도(年度), 계절, 달, 날짜(간지)의 차례로 쓴

특별히 설명을 요하는 주석 부분에는 작은 글씨로 세주(細註)를

그 부록으로 그 왕의 행록(行錄)·행장(行狀)·시장(諡狀)·애책문(哀
내용출처 : http://sillok.history.go.kr/(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일부 수정,직접 서술
6. 측우기(測雨器)
우량(雨量)을 측정하던 기기(機器).
관상감측우대, 보물 제843호
금영측우기(조선), 보물 제561호, 국립중앙기상대 소장
창덕궁 측우대, 보물 제844호
예로부터의 잦은 홍수와 가뭄으로 인한 피해 및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업생산구조는 일찍부터 강우현상에 주목하고 우량을 측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강우량 측정방법은 매우 부정확한 것이었으므로 보다 과학적인 측정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441년(세종 23) 8월에 서운관(書雲觀)에서 측우기를 제작하게 되었다.
당시의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각 도 감사(監司)가 강우량을 보고하는 법이 있으나, 땅이 말랐을 때와 젖어 있을 때에 따라 땅속에 스며드는 빗물의 깊이가 같지 않아 그것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청컨대, 서운관에서 대를 만들고 깊이 2자(尺) 지름 8치(寸)의 철기(鐵器)를 주조하여 대 위에 놓고 빗물을 받아 본관원(本觀員)에게 그 깊이를 재어서 보고하게 하고…… 또한 외방(外方) 각 관에서는 경중(京中) 주기(鑄器)의 보기에 따라 자기(磁器)나 와기(瓦器)를 써서 객사의 뜰에 놓아두고 수령이 물의 길이를 재어서 감사에게 보고하게 하여 감사가 전문(傳聞)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에 따랐다.
" 이 기사는 불완전했던 강우량 측정법을 기기를 써서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역사적 기록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어떤 자로 언제 어떻게 잰다는 구체적인 측정법을 제시하지는 않은 점을 보아 측우기는 제작했으나, 우량의 측정 제도는 완전하게 확립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측우기에 의한 우량의 측정 제도가 확립된 것은 1442년 5월이다. 이때 처음으로 〈세종실록〉에 측우기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쇠를 부어 만든 측우기는 길이가 1자 5치, 지름이 7치로 개량되고, 강우량은 비가 그쳤을 때 주척(周尺)을 써서 자·치·푼(分)까지 정확하게 재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 일시와 갠 일시를 기록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강우량의 측정은 각 도와 군·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시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확정된 측우기는 높이 32㎝, 지름 15㎝가량의 철제 원통이고, 주척의 길이는 약 21㎝이다. 이때부터 측우기로 강우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일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측정된 강우량은 곧 집계되고 각 지방의 통계는 중앙에 정기적으로 보고되어 전국에 걸친 강우량이 정확히 기록·보존되었다. 강우량을 재는 과학적인 방법이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아직 싹트지 않았을 때 조선에서 확립되었음은 매우 큰 의의를 가진다.
1442년 5월 측우기를 이용한 강우량 측정 제도가 확립되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서울과 각 도, 그리고 군·현에 이르기까지 같은 규격의 측우기에 의한 강우량의 측정이 시작되어 이후 100여 년 동안은 잘 시행되었다.
그러나 그후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임진왜란의 참화는 측우기에 의한 강우량 측정의 전통을 단절시켰다. 단절의 시기는 1세기 반 이상이나 계속되었으며 세종 때 만든 측우기는 모두 유실되었다.
그후 숙종 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천문과학을 비롯한 과학기술의 새로운 기운은 영조 때에 이르면서 부흥하게 되었다. 이때 오랫동안 잊혀졌던 측우기 사용의 절실함과 그에 의한 강우량 측정의 과학적인 이치가 새삼스럽게 제기되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세종조의 옛 제도에 따라 측우기를 만들도록 명했다. 하교(下敎)하기를 실록 가운데에 측우기에 대한 조항을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일어나 앉게 된다.
요즈음은 비록 비를 비는 시기는 아니나 수표(水標)의 상황을 보고하게 하여 그 얕고 깊음을 알고자 하는데, 이 기기(機器)에는 지극한 이치가 담겨져 있으며 또 힘이 드는 것도 아니다.
이 제도에 따라 서운관으로 하여금 이를 만들어 8도에 놓게 하고 양도(兩都)에도 이를 만들어 놓게 하라.…… 지금도 그 예를 따라 경희궁과 창덕궁에 모두 측우기를 설치하라." 이리하여 1770년(영조 46) 5월 1일에 새 측우기가 다시 등장했다. 그것은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세종 때의 것과 같은 크기였다. 돌로 만든 대에는 측우대(測雨臺)라 새기고, 만든 연·월을 기록해놓았다.
지금 기상청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 그때 만든 측우대 중의 하나이다. 이때 부활된 측우기에 의한 강우량의 측정제도는 다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측우기는 지방에서도 청동으로 같은 규격에 따라 주조되어 전국적인 강우량의 통계가 정기적으로 집계되는 일도 계속되었다.
〈정조실록〉에 기록된 1792년(정조 16) 이후 8년간의 강우량 통계는 조선시대의 강우량 관측 결과의 공식 자료로서 매우 귀중한 것이다. 또 1799년 5월의 기사에는 전년의 같은 달인 5월 한 달 동안의 강우량과 그해 5월의 강우량을 비교하고 있어 월계(月計)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측우기는 1782년에도 만들어졌다. 지금 여주 세종대왕릉의 전시실에 보존되어 있는 기념비적 대리석 측우대는 그 유물이다. 거기에는 측우기 제작의 역사와 의의를 말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또 국립중앙과학관에 보존되어 있는 1811년의 측우대는 순조 때에도 측우기가 만들어졌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측우기는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 관서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제작되었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837년에 공주 감영에서 제작된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뿐이다. 현재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어 기상청에 보존되어 있는데, 안지름 14.0㎝, 깊이 31.5㎝의 청동제로 무게가 6.2㎏이다.
이 측우기는 1971년에 일본 기상청에서 반환된 것인데, 3단으로 분리할 수 있게 조립식으로 만든 것이 특이하다.
측우기 유물은 1920년초의 보고에 의하면 1770년 영조 때에 만들어진 3개가 측우대와 함께 남아 있었고 그밖에도 몇 개가 더 남아 있었다.
그러나 현재 금영측우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실되고 없으며 측우대도 5개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 대석들에는 윗면에 지름 16.0~16.5㎝가량의 구멍이 있어서 직경 15㎝가량의 측우기를 올려놓고 우량을 측정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측우기는 15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세계 최초의 기상 관측기기이다. 조선에서는 이 기기를 이용해 수백 년 동안 전국적으로 강우량 측정을 했다. 초기의 관측기록은 거의 없어졌지만, 1770년 이후부터 140년 동안의 서울 관측기록이 남아 있다. 그것은 현대의 관측치까지 합하면 220년 이상의 연속 관측기록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귀중한 자료이다.
내용출처 : 퍼옴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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